오키나와의 해상강국 류큐 왕국, 그 독자적인 역사의 놀라운 흔적들
안녕하세요! 오늘은 서울에서 비행기로 단 두 시간 거리에 위치한, 천혜의 휴양지 오키나와로 함께 떠나볼까 합니다. 오키나와를 마주하면 우리에게 익숙한 제주도와 묘하게 닮았다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마치 한국에 제주도가 있다면, 일본에는 오키나와가 있다고 할까요? 하지만 이 아름다운 섬에는 일본 본토와는 전혀 다른, 독자적인 역사를 가진 류큐 왕국의 흔적이 깊이 배어 있습니다.
특히 오키나와의 상징인 슈리성을 보면, 일본 본토의 건축 양식과는 확연히 다른 이국적인 멋을 느낄 수 있는데요. 과연 이곳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았으며, 어떤 역사를 품고 있었을까요? 지금부터 그 비밀을 함께 탐험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c1JySL5mMA
온화한 아열대 기후와 전략적 요충지
오키나와는 일본에서 유일하게 아열대 해양성 기후에 속하며, 연평균 기온이 약 23도에 달합니다. 겨울철에도 평균 기온이 14~20도로 온화하여, 한국의 제주도와 대만 북부와 기후적으로 유사하지만 제주도보다는 더 덥고 태풍과 해풍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이러한 온화한 기후 덕분에 한국과 일본 프로야구 팀들이 겨울과 봄 시즌을 앞두고 전지훈련 장소로 오키나와를 즐겨 찾으며, 심지어 '오키나와 리그'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한국팀과 일본팀의 경기가 자주 열리기도 합니다. 오키나와에는 무려 10여 개에 달하는 큰 야구경기장이 있는데, 그중 가장 큰 야구장은 나하시에 위치한 약 3만 명 수용 규모의 **오키나와 셀룰러 스타디움 나하(沖縄セルラースタジアム那覇)**입니다. 오키나와는 지리적으로 센카쿠 열도와 가깝고 대만과도 인접해 있으며, 태평양 한가운데 위치하여 미국에게도 군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곳으로 여겨져 오랫동안 공을 들여왔습니다.
놀라운 인구 밀집도와 숨겨진 역사
이 외딴 섬 오키나와에는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오키나와 본섬에만 무려 132만 명이 살고 있는데, 이는 제주도의 2배가 넘는 인구입니다. 관광객이 아닌 실제 거주 인구가 이 정도라는 것은 정말 놀라운데요. 오키나와의 인구는 1800년대 류큐 왕국 시절 10만 명대 후반으로 추정되는데, 이게 작은 수는 아닌 것이 일본에 에도, 오사카, 쿄토와 같은 3도가 아니면 큰 도시가 없었거든요. 한국에도 한양이 18만명을 넘는 수준으로 보고, 그 외 평양은 10만명대 초반 이하로 보는데 그만큼 류큐에 인구가 많았다는 의미입니다.
1900년대에는 의료, 위생, 농업 발달로 40만 명대로 진입했습니다. 1940년에는 64만 명까지 늘어났다가 1945년 2차 세계대전으로 40만 명대로 급감했지만, 미군정 시기 이후 빠르게 회복하여 92만 명까지 증가했고, 1970년대에는 100만 명을 돌파했습니다. 이후 일본의 버블 경제와 함께 관광 산업이 성장하면서 현재의 인구에 이르게 됩니다. 오키나와현 전체 인구는 주변 섬들을 포함하여 총 145만 명에 달합니다. 이는 한국의 대전시나 광주시 같은 대도시 인구와 비슷하며, 미국으로 치면 샌안토니오 정도, 일본의 교토시나 고베시 인구에 달하는 규모입니다. 국가로 치면 에스토니아 인구를 넘죠. 그러다 보니 인구밀도는 약 620명/km²으로 괌이나 사이판 보다 2배나 많은데, 특히 수도같은 나하시에 모여사는데 나하시만 치면 약 7,738명/km²으로 일본의 왠만한 대도시들을 빼고는 가장 높고 한국의 부산 해운대구, 인천 남동구 수준이니 얼마나 사람이 많은지 아시겠죠? 이 작은 섬에 말이죠. 국제공항에 미군기지 까지 있는데 말이죠.
특히 나하시로부터 300km 떨어진 **미야코지마(宮古島)**에는 5만 5천 명, **이시가키지마(石垣島)**에 5만 명, 으로 한국의 최소 시기준 5만명을 넘고 100km 떨어진 **쿠메지마(久米島)**에 약 7천 명, 그리고 일본 최서단이자 대만과 가까운 **요나구니지마(与那国島)**에도 1,700명이 살고 있는데, 이 섬은 오키나와 본섬에서 무려 509km나 일본본토와는 1,000km를 훨씬 넘게 떨어져 있습니다.
일본 본토와는 다른 언어, 그리고 제주도와의 문화적 공통점
오키나와에서 사용되는 **우치나구치(沖縄口, うちなーぐち)**는 단순히 일본 표준어의 방언이라고 하기에는 그 차이가 매우 커서,
별개의 언어 또는 류큐어파의 한 갈래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입니다. 실제로 일본 본토 사람들은 우치나구치를 거의 알아듣지 못합니다. 사실상 전혀, 우리로 치면 제주도 방언을 서울 사람들이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죠. 사실 전혀죠. 의미가 반대인 경우도 있고요.
몇 가지 오키나와 방언을 알아볼까요?
안녕하세요: はいさい(하이사이, 남성) / はいたい(하이타이, 여성) (일본어: こんにちは)
어서 오세요: めんそーれー(멘소레) (일본어: いらっしゃいませ)
고맙습니다: にふぇーでーびる(니훼데비루) (일본어: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
아름답다: ちゅらさん(츄라상) (일본어: 美しい) 우츠쿠시이
엄마: あんまー(안마) (일본어: お母さん)
아버지: うとぅー(우투) (일본어: お父さん)
이렇게 언어가 상당히 차이가 나는 이유는, 오키나와가 일본의 영토가 된 역사가 그리 길지 않고 별개의 문화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독자성은 한국의 제주도를 통해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주도에는 **제주 고씨(高氏)**가 2015년 기준 33,000명으로 제주시 전체 인구의 8.24%를 차지하여 제주도에서 세 번째로 흔한 성씨입니다. 제주 고씨는 한국 전체 인구 순위로는 22위에 불과하며 전체 인구의 0.92%에 불과한데, 제주도에만 8% 이상이 살고 있다는 것은 약 8배나 많은 엄청난 집중도입니다. 이는 제주 고씨가 고을나(高乙那)를 시조로 하는 **탐라국(耽羅國)**을 세운 성씨이기 때문이며, 제주도 인구 유입 이전에는 그 비율이 더욱 높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한국 사회에서 수도권으로 인구 이동이 많았던 역사 속에서도 지역 성씨 인구가 높다는 것은 그 지역의 문화 특성과 오랜 역사를 반영하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실제로 한반도 내에서도 지역별로 특별히 많은 성씨들이 있습니다. 김,이,박 씨는 경상도에 특히 많아 신라 멸망 이후에도 조상들이 주로 거주했음을 의미하고, 전라도에는 문, 임, 오, 선, 노 씨 등이, 충청도에는 신,한,송,지 씨 등이, 강원도에는 유, 최, 심, 엄 씨 등이 다른 지역보다 많이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분포는 한국 사회의 오랜 역사와 이주 패턴, 혈연 중심의 사회 구조를 반영하는 흥미로운 특징입니다.
제주 탐라국과 류큐 왕국의 오랜 역사: 역사는 늘 새롭게 바뀐다
제주도는 탐라국이라는 이름으로 1105년 고려 숙종 10년에 탐라군으로 개편되기 전까지, 무려 천 년 이상, 최대 1,400년간 지속된 독자적인 왕국이었습니다. 한국에 천년 이상 지속된 왕조는 신라가 유일하죠? 제주도 신화에 따르면 기원전 2337년에 시작되었다고도 하며, 출토된 유물만으로도 3세기경에 국가 형태를 갖추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문헌에는 1세기경으로 보기도 하고, 삼국사기에는 476년에 백제에 토산물을 바쳤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러한 고대 기록들은 현재 남아있는 기록과 유물만으로 유추하는 것이며, 기술이 발달하면서 앞으로 모든 역사서는 다 바뀌게 될 겁니다. 땅을 파지 않고도 유물을 볼 수 있는 기술이나 탄소연대 측정 등을 통해 더욱 고대의 역사들이 밝혀지면서, 우리는 늘 깨어있는 자세로 역사를 새롭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류큐 왕국과 제주도의 간접적인 교류: 표류민과 삼별초
류큐 왕국(현재의 오키나와)과 제주도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섬 지역이라는 공통점 외에도, 역사적으로 간접적인 교류가 있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표류민 발생 및 송환 기록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제주도에서 배를 타고 가던 사람들이 풍랑을 만나 류큐 왕국으로 표류했다가 류큐 측의 도움으로 조선으로 송환된 기록이 여러 차례 남아 있습니다. 반대로 류큐 사람들이 조선(제주도 포함)으로 표류하는 경우도 있었고, 조선 역시 이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이는 두 지역이 해상 활동이 활발했고 자연재해에 따른 표류가 잦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며, 이러한 과정에서 간접적인 정보 교환이나 문화적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1477년(성종 8년)에 제주도의 귤을 진상하려던 사람들의 배가 풍랑을 만나 류큐국의 요나구니 섬에 도착했다가 1479년에 다시 조선으로 돌아온 기록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흥미로운 학설로는 삼별초와의 연관성이 제기됩니다. 고려 말 삼별초가 1273년(원종 14년) 제주도에서 몽골군에 패한 후, 일부 세력이 완전히 멸망하지 않고 오키나와로 건너가 류큐 왕국의 건국에 영향을 주었을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실제로 오키나와에서 '계유년고려와장조(癸酉年高麗瓦匠造)'라는 명문이 새겨진 고려식 기와가 발견되기도 했는데, 이는 1273년(계유년)에 고려 장인이 만들었음을 시사하며, 삼별초 세력의 이동과 연관 지어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류큐 왕국의 흔적들을 찾아서
오키나와는 일본 열도와는 별개의 문화권으로 독자적인 류큐 왕국을 형성했습니다. 그 흔적들은 지금도 오키나와 곳곳에 남아있습니다.
슈리성(首里城, Shuri Castle): 류큐 왕국의 정치, 외교, 문화의 중심지였던 왕궁이자 가장 중요한 상징적 건축물입니다. 안타깝게도, 2019년 10월 31일 새벽 슈리성 정전을 포함한 주요 건물들이 대규모 화재로 소실되는 비극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슈리성은 14세기 말에 처음 건설되어 약 450년간 왕국의 중심지 역할을 했으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슈리성은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 등과의 중계무역으로 번성했던 류큐 왕국의 대외 교류 창구였고, 중국 황제의 사신을 맞이하는 의식도 이곳에서 거행되었습니다.
슈리성은 류큐 왕국 고유의 건축 기술에 중국과 일본의 건축 양식이 융합된 독특한 특징을 보여줍니다.
중국풍 요소: 붉은색 기와, 용 문양 장식, 건물의 배치 방식 등에서 중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지난번 대만 편에서 많이 볼 수 있죠?
일본풍 요소: 지붕 형태나 내부의 다다미 방 등에서 일본의 영향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지난번 도요토미 히데요시편에서 보실 수 있죠.
류큐 고유 요소: 기와에 박힌 시사(シーサー, 오키나와 사자상) 등 류큐 특유의 장식과 건축 기법이 적용되었습니다.
핵심 건물인 **정전(正殿)**은 류큐 왕국 시대 최대 규모의 목조 건축물로, 왕좌와 대들보에 용 문양이 새겨져 있어 류큐 왕국의 위엄과 독자성을 상징합니다. 용문양은 4조룡으로 당시 조선의 용문양과 같은 등급의 용 문양을 사용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이는 당시 명과 청이 대하는 태도를 의미했으니까요. 황제만 5조룡을 사용할 수 있었고요.
슈리성에는 슈레이몬(守礼門), 칸카이몬(歓会門) 등 여러 문들이 있으며, 현재 방문객들이 볼 수 있는 건물들은 1992년에 복원된 것들입니다. 현재 2026년 정전의 완전 복원을 목표로 재건 작업이 활발히 진행 중이며, 방문객들은 재건 과정을 직접 볼 수 있도록 일부 구역이 개방되어 있습니다.
소노히얀 우타키 이시몬은(園比屋武御嶽石門, Sonohyan Utaki Stone Gate): 슈리성 바로 옆에 위치한 신성한 돌문으로, 류큐 왕국 국왕이 성 밖으로 나설 때 안전을 기원하던 곳입니다. 1519년 제2쇼씨 왕조 시대에 건립되었으며, 류큐 특유의 석조 건축 기술과 일본 건축 양식이 절충된 독특한 양식을 보여주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다마우둔(玉陵, Tamaudun): **류큐 왕국 역대 국왕과 왕족들의 능묘(왕실 묘지)**입니다. 1501년, 제2쇼씨 왕조의 제3대 국왕인 **쇼신왕(尚真王)**에 의해 건립되었는데, 쇼신왕은 류큐 왕국의 전성기를 이끌었으며 중국 명나라에 대한 책봉을 받고 조공 무역 체제에 편입하며 일본, 조선, 동남아시아와의 중계 무역을 적극적으로 확대하여 번영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쇼엔왕의 유해를 안치하기 위해 지어졌습니다. 다마우둔은 동실에는(東室, 왕과 왕비 유골), 중앙실에는(中室, 시신을 안치하고 일정 기간 풍장을 통해 육골화하는 공간)이고, 서실(西室, 왕자, 왕녀 등 왕족 유골)로 구성됩니다. 이는 시신을 중앙실에 안치한 후 육탈하면 뼈를 깨끗이 씻어(세골) 항아리에 담아 안치하는 류큐의 전통 장례 문화인 '풍장'과 '세골'의 영향을 받은 지상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이곳은 류큐 왕국의 주요 사족(士族)들이 묻힌 곳이기도 합니다. 류큐 왕국의 사족들은 대부분 쇼씨(尚氏), 모씨(毛氏), 고씨(向氏), 오씨(翁氏), 바씨(馬氏), 테이씨(程氏), 킨씨(金氏) 등 중국풍의 한자 성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주도와 지리적 근접성과 역사적 교류에서 고씨가 어떤 접점이 있는가 의문이 드네요? 삼별초가 제주도에서 류큐로 건너가 건국했다는 주장도 있죠? 물론 루머입니다만, 평범한 성씨도 아니고 굉장히 특이하네요.
어쨋든 모씨 일문은 류큐 왕국 내에서 가장 유서 깊고 강력한 사족 가문 중 하나로, 많은 재상급 인사를 배출했으며 그들의 묘지는 대규모의 귀갑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고씨 일문 역시 왕가의 방계로 큰 영향력을 가졌던 명문가이며, 오씨 일문은 중국 복건성에서 귀화하여 주로 역관이나 외교 관련 직책을 담당했습니다. 류큐의 일반 무덤 또한 독특한 형태를 가지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귀갑묘(亀甲墓, 거북 등껍질 무덤)**는 거북이 등껍질을 뒤집어 놓은 듯한 둥근 지붕 형태로 중국 남부 지역의 영향을 받았으며, 역시 '세골' 방식이 사용되었습니다. **파풍묘(破風墓, 박공 지붕 무덤)**는 일본 가옥의 지붕과 비슷한 작은 집 형태로, 다마우둔과 유사한 형태를 띠고 주로 지배 계층에게 허용되던 양식이었습니다. 이토만시에 위치한 오키나와 키요미노오카 공원묘지에서는 이러한 귀갑묘와 파풍묘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시키나엔은(識名園, Shikinaen Garden): 류큐 왕족의 별장이자 외교 사절 접대 장소로 사용되었던 정원으로, 류큐 독자 양식과 중국 문화를 융합한 아름다운 정원입니다. 1799년에 완성되었습니다.
자키미 구스쿠는(座喜味城跡, Zakimi Castle Ruins): 류큐 왕국 시대 축성 기술의 진수를 보여주는 성터로, 15세기 초반에 명장 **고사마루(護佐丸)**에 의해 축조되었습니다. 완만한 곡선 성벽과 아치형 돌문이 특징이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입니다.
가쓰렌 구스쿠는(勝連城跡, Katsuren Castle Ruins): 15세기 중반 성주 **아나와리(阿麻和利)**의 거점이었던 성터로, 바다를 조망하는 경치가 일품입니다. 이곳에서는 중국제 도자기, 한국제 기와, 아라비아 주화 등 다양한 해외 유물들이 발굴되어 당시 중계 무역의 활발함을 짐작하게 합니다. 특이하게 한국제 도자기가 아니라 기와가 발견되었다? 좀 의문이 들긴합니다.
나카구스쿠 구스쿠는 (中城城跡, Nakagusuku Castle Ruins): 고사마루에 의해 크게 증축된 성터로, 그의 비극적인 최후(아나와리의 모략으로 반역 혐의를 받고 자살)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1853년 페리 제독도 이 성의 정교한 축성 기술에 감탄했다고 전해집니다.
세이화 우타키는 (斎場御嶽, Seifa Utaki): 류큐 왕국 최고의 성지이자 기도 장소로, 자연 그대로의 바위, 숲, 동굴 등을 신으로 숭배하는 류큐 신앙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특히 최고 여사제인 **키코에오오기미(聞得大君)**의 즉위 의식 등 중요한 종교 의식이 이곳에서 거행되었습니다.
이 외에도 슈리성 근처의 인공 연못인 류탄(龍潭), 그 안의 작은 섬에 위치한 사당 벤자이텐도(弁財天堂), 왕실 사찰이었던 엔가쿠지(円覚寺跡), 중국 상인들이 바다의 여신 마조를 모시던 덴피라(天妃宮跡), 류큐 왕국 시대 마을을 재현한 체험형 테마파크 무라사키무라(むら咲むら), 그리고 류큐 왕국의 역사와 문화, 예술품을 체계적으로 접할 수 있는 오키나와현립 박물관·미술관(沖縄県立博物館・美術館) 등 수많은 흔적들이 오키나와 전역에 남아 있습니다.
일본 통합 이후의 오키나와: 근현대 건축물과 도시 발전
류큐 왕국은 대항해 시대 이후 유럽 세력의 등장과 일본 국내의 통일 등 강력한 주변 세력에 위협을 받으며 중계무역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압박과 사츠마 번과의 관계 악화 등으로 외교적인 어려움을 겪었으며, 1854년 미국의 매튜 페리 제독이 류큐에 기항하여 류큐-미국 수호 통상 조약을 맺었습니다. 이후 1872년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 국가가 된 일본은 류큐를 번(藩)으로 격하시켰고, 마침내 1879년 오키나와현이 설치되면서 류큐 왕국 시대는 종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일본에 통합된 뒤 오키나와는 새로운 근현대 건축물들을 통해 발전해왔습니다.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은(沖縄平和祈念公園): 제2차 세계대전 오키나와 전투의 희생자를 추모하고 평화를 기원하는 공원으로, 넓은 녹지와 함께 탁 트인 바다와 평화의 돌무덤들이 어우러져 있습니다.
오키나와현립 평화기념자료관은(沖縄県立平和祈念資料館): 오키나와 전투와 미군 통치 등 오키나와 근현대사의 아픔을 기록하고 전시하는 자료관입니다.
구 해군 사령부壕는 (旧海軍司令部壕): 오키나와 전투 당시 일본 해군이 사용했던 지하 사령부 벙커로, 당시의 처참한 상황을 엿볼 수 있습니다.
히메유리 평화기념자료관은(ひめゆり平和祈念資料館): 오키나와 전투 당시 간호 요원으로 동원되어 희생된 여학생들('히메유리 부대')의 비극을 다룬 기념관입니다.
이 외에도 근대 이후 오키나와의 정치적 중심지를 상징하는 오키나와 현지사 관저(沖縄県知事公舎), 오키나와 전투로 폐허가 된 후 전후 부흥의 상징이자 현재 오키나와 상업의 중심지인 나하시 국제거리(那覇市国際通り, Kokusai Dori Street), 지역 주요 언론사인 오키나와 타임스 빌딩(沖縄タイムスビル) 등이 있습니다.
1920년대에는 무역 활성화에 따라 나하 항 주변에 서양식 건물이 다수 건설되었고, 1960년대에는 관광객 증가에 맞춰 **나하 공항 터미널(那覇空港ターミナル)**이 확장되었습니다. 1990년대에는 대규모 국제 회의 유치를 위한 **오키나와 컨벤션 센터(沖縄コンベンションセンター)**와 **오키나와현 청사(沖縄県庁舎, 71.7m)**가 완공되었습니다. 2000년대 이후에는 나하시를 중심으로 주상복합이나 호텔 건물들이 많이 들어섰습니다.
D'그라포트 오키나와 타워(D'グラフォート沖縄タワー, 89.8m) (2007년 완공), 프레미스트 마키시 타워 국제거리(プレミスト牧志タワー国際通り, 88.9m) (2010년 완공), 나하 신도심 센터 빌딩(77.8m) (2011년 완공) 등이 있으며, 특히 **류크스 타워 더 웨스트(RYU:X TOWER The West)**는 **104.8m (30층)**로 2013년 완공 당시 오키나와 최고층 빌딩 중 하나가 되어 나하시의 도시화와 고층화 흐름을 상징합니다. 오키나와 본섬은 아니지만, 2015년 개통된 **이라부 대교(伊良部大橋)**는 이라부 섬과 미야코 섬을 잇는 총 길이 3,540m의 일본 최장 무료 다리로, 오키나와 주변 섬들의 관광과 인프라 발전을 상징합니다.
오키나와의 경제: 관광과 미군 기지
오키나와 경제를 지탱하는 주요 산업은 단연 관광업입니다. 현내 총생산(GDP)의 약 **30~40%**를 차지하며, 숙박업, 음식점, 소매업, 운수업 등 관련 산업에 막대한 고용을 창출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자연 경관, 해양 스포츠, 류큐 문화 등을 바탕으로 국내외 관광객을 유치하며 경제적으로 성장해 왔습니다.또한, 오키나와는 일본 내 미군 기지의 70% 이상이 집중된 곳으로, 미군 기지 관련 경제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미군 장병 및 그 가족들의 소비 활동, 기지 내 고용, 기지 관련 사업 등이 지역 경제에 영향을 미치며, 이 비중은 전체 경제의 20~25%에 달한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농업과 어업은 비중은 작지만 (GDP의 약 1~2%대) 중요한 산업으로, 파인애플, 사탕수수, 망고 등 아열대 작물과 돼지고기, 그리고 참치와 같은 어업이 이루어집니다.
오키나와의 아름다움을 품은 휴양지
오키나와는 이러한 경제적 성장을 바탕으로 수많은 호텔과 휴양지가 들어섰습니다. **더블 트리 바이 힐튼 나하 슈리 성(DoubleTree by Hilton Naha Shuri Castle)**은 슈리성 근처의 주요 호텔이며, 세련되고 소박한 객실을 갖춘 고급 해변 호텔인 호시노야 오키나와(HOSHINOYA Okinawa), 그리고 깔끔한 객실과 스위트룸을 갖춘 오키나와 그랜드 메르 리조트(Okinawa Grand Mer Resort) 등 다양한 숙박시설이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나하시에는 전통적인 류큐 도자기를 판매하는 상점들이 모여있는 츠보야 야치문 거리(壺屋やちむん通り), 중국 푸저우시의 정원을 재현한 후쿠슈엔(福州園), 그리고 면세 쇼핑을 즐길 수 있는 DFS 갤러리아 오키나와(DFS Galleria Okinawa) 등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있습니다.
오키나와와 나하의 어원, 그리고 교육과 인프라
**오키나와(沖縄)**라는 이름은 한자 **沖(오키)**가 '바다 한가운데', '먼바다'를 의미하고, **縄(나와)**는 '새끼줄', '밧줄'을 의미합니다.
이를 합쳐서 "먼 바다에 떠 있는 밧줄(혹은 새끼줄)처럼 길게 이어진 섬들"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류큐(琉球)**라는 단어의 한자 '琉(류)'는 '유리'나 '보석'을, '球(큐)'는 '구슬'이나 '공'을 뜻합니다. **나하(那覇)**의 유래 중에는 갯벌이나 늪지대가 많았고 그 사이로 물길이 나 있었는데, 이를 류큐어로 '나(ナー)' 또는 '나하(ナハ)'라고 불렀다는 설이 있습니다. 나하 항과 더불어 오키나와 섬과 주변 도서들을 잇는 주요 항구인 **도마리 항(泊港)**도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오키나와는 140만 명에 달하는 인구 규모에 걸맞게 8~9개의 4년제 대학이 있습니다. **류큐 대학(琉球大学)**은 오키나와현 유일의 국립대학으로 가장 높은 학술적 위상을 가지며, 미군 통치 시기에 설립되었습니다. 예술 분야에 특화된 오키나와 현립 예술대학(沖縄県立芸術大学), 오키나와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사립대학 중 하나인 오키나와 국제대학교(沖縄国際大学), 그리고 오키나와 최초의 대학 중 하나인 오키나와 대학(沖縄大学) 등이 오키나와의 고등 교육 발전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오키나와현은 섬 지역 특성상 강수량에 크게 의존하는 물 공급 시스템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키나와 본섬에는 식수 및 생활용수 확보를 위한 여러 개의 댐이 건설되어 있으며, 나하시에 위치한 **킨조 댐(金城ダム)**이 대표적입니다. 또한, 지질학적 특성을 활용한 지하 댐도 여러 곳 건설되어 있습니다.
에너지 측면에서는 주로 화력 발전에 의존하고 있으며, 석유는 대부분 중동에서, 가스나 석탄은 현재까지 호주에서 주로 수입하고 있습니다.
한국처럼 태풍이 잦아 풍력발전 시설은 바람이 많이 불어도 자주 망가지는 문제가 있습니다.
나하시 내의 관광은 **유이레일(오키나와 도시 모노레일)**을 통해 충분히 가능합니다. 나하공항역부터 데다코우라니시역까지 총 19개 역을 운행하며 나하 시내를 남북으로 관통하고 주요 관광지와 연결됩니다. 나하공항역, 슈리역, 국제거리와 가까운 현청앞역과 마키시역, 박물관이 있는 오모로마치역 등이 주요 역입니다. 배차 간격은 약 10분 정도이며, 1일권, 2일권, 3일권 등 다양한 패스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오키나와를 방문하는 관광객 수는 엄청납니다. 2017년에는 오키나와를 방문한 한국인 관광객이 1,150,550명으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으며, 한국인이 100만명이상 놀러가는 도시는 다낭, 방콕, 호치민, 타이베이나 괌, 세부 처럼 유명한 관광지임을 감안하면 엄청나게 간다는거죠. 2024년 1월에는 나하공항 입국자 중 한국인이 17,543명으로 전체의 34%를 차지하며 1위를 기록했습니다. 한국인 외에도 대만, 중국 등 다양한 외국인 관광객이 오키나와를 찾고 있습니다.
낮은 산이 품은 오키나와의 풍경
오키나와는 대만이나 제주도와 달리 높은 산이 없습니다. 북쪽에 500미터 정도의 산이 있지만, 주요 지역인 나하 근처에서 가장 높은 산은 **벤가다케(弁ヶ岳)**로, 150미터 정도의 언덕 수준입니다. 이 산을 둘러싸고 무덤들이 빼곡히 둘러져 있는 모습은 오키나와만의 독특한 풍경을 자아냅니다.
오키나와에는 아름다운 해변과 공원이 많습니다. 아메리칸 빌리지 근처의 긴 백사장과 야자수가 아름다운 아라하 비치(アラハビーチ), 태평양을 360도로 조망할 수 있는 곶인 지넨미사키 공원(知念岬公園), 나하 공항 근처에 있는 작은 섬으로 아름다운 석양과 비행기 이착륙을 볼 수 있는 **세나가지마 섬(瀬長島)**의 우미카지 테라스 등이 대표적인 곳입니다.
류쿠 왕국이라는 독자적인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오키나와는, 온화한 기후와 아름다운 자연을 기반으로 세계적인 휴양지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단순히 휴양을 넘어, 일본 본토와는 다른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 그리고 제주도 탐라국과 닮은꼴의 역사를 품고 있는 매력적인 섬입니다. 다음번에 오키나와를 방문하신다면, 에메랄드빛 바다와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도 좋지만, 슈리성과 다마우둔, 그리고 곳곳에 숨겨진 류큐 왕국의 흔적들을 찾아보시는 건 어떨까요? 이 섬이 간직한 역사의 깊이와 독자적인 문화의 향기를 느껴보신다면, 오키나와를 바라보는 시선이 더욱 풍요로워지고 또 다른 감정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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