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부도

한국전쟁의 미국 시점, 한국군 10만명에 탱크 1대도 없던 6.25 전쟁에서 미군은 왜 유엔군을 연합해 한국을 지켰나

다시읽는사회과부도 2025. 6. 2. 22:07

여러분, 6.25 한국전쟁 하면 뭐가 가장 먼저 떠오르시나요? 아마 많은 분들이 인천상륙작전을 떠올리실 겁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죠. 그리고 미국이 우리나라를 도와준 것, 그게 없었다면 어땠을까? 이런 생각도 들죠. 그런데 말입니다. 미국은 정말 처음부터 한국을 도울 준비가 되어 있었을까요? 계획대로 착착 진행된 걸까요? 사실, 우리가 아는 것과는 다른, 전쟁 시작 전후의 놀라운 사실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한국전쟁 발발 당시의 혼돈과 진실, 그리고 미국이 왜, 그리고 어떻게 이 전쟁에 깊숙이 개입하게 되었는지, 그 숨겨진 뒷이야기를 하나씩 파헤쳐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충격적인 사실들이 드러날 겁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Z1ijn0V_ch0

 

 

 

1. 전쟁 직전, 미국의 대한반도 인식과 한국군의 상태

미국은 전쟁 전에 한국에게 무엇을 주었고, 무엇을 주지 않았을까요? 놀랍게도, 미국은 전쟁 전에 남한이 오히려 북한을 침공할 가능성을 우려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공격용 무기, 예를 들면 탱크, 전투기, 중포 같은 것들은 거의 주지 않고, 오직 방어용 무기만 지원했습니다. 이것은 미국이 한국 독자적으로 북진 통일을 시도하는 것을 강하게 막으려 했던 의도가 있었습니다. 미국 군대는 전쟁이 나기 직전에 어디에 있었을까요? 1949년 6월, 미국은 주한미군을 대부분 철수시켰고, 아주 소수의 군사고문단만 남겼죠. 이것이 조선인민공화국이 남침을 결심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관점도 있죠. 당시 미국은 한반도가 자신들에게 전략적으로 중요성이 낮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즉, 전쟁 직전 미국은 한국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남한의 북진을 경계했던 것이죠.

 

당시 한국 군대의 상태는 어땠을까요? 조선인민공화국의 최신 무기에 맞설 힘이 있었을까요? 한국군은 소총 같은 개인화기 위주였고, 조선인민공화국군이 가진 소련제 T-34 탱크나 야수 전투기 같은 최신예 무기는 전혀 없었습니다. 한국군의 바주카포나 대전차포는 조선인민공화국군의 T-34 탱크에 역부족이었습니다. 

 

한국군은 장비는 옛 일본군의 구식 소총이 중심이었고, 중화기는 미 군사 협정 제약으로 아주 약간만 지급되었으며, 전차는 불과 단 한 대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K2 전차를 수출하고 있는 방산 강국이 되었다는게 믿기지가 않네요. 게다가 한국인들은 1950년 이전까지 약 50년간 전쟁 경험이나 군사훈련은 거의 없었습니다. 일제 시대 이전에도 전쟁 경험이 거의 없었죠. 이렇게 준비가 거의 안 된 상태였던 상태에서 도대체 어떻게 북진을 생각했다는건지 참담하기도 합니다.

 

2. 전쟁 발발과 미국의 초기 대응 (feat. 맥아더와 무능한 미군?)

1950년 6월 25일, 조선인민공화국군이 38선을 넘어 침공해 왔습니다. 이 보고를 받은 맥아더의 첫 반응은 어땠을까요? 전쟁이 터졌을 때, 영웅 맥아더 장군은 과연 침착했을까요? 아니면 당황했을까요? 의외로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이걸 단순한 '위력 정찰' 정도로 생각했고, 워싱턴이 방해만 안 하면 '한쪽 팔을 뒤로 잡은 상태에서도 처리해 보겠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했죠.

 

다음 날, 주한 미국 대사가 미국 민간인 철수를 명령했을때도 맥아더는 '시기상조이며 조선에 패닉을 일으킬 수 있다'고 쓴소리를 했습니다. 그런데 불과 하루 뒤인 6월 27일, 맥아더는 몹시 낙담한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그는 '조선 전역을 잃을 것이다. 우리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미국인들을 안전하게 출국시키는 것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불과 이틀 만에 상황 판단이 완전히 바뀐 겁니다. 맥아더가 왜 그렇게 변했을까요? 사실 당시 미군도 제2차 세계대전 종결 후 대폭적인 군사비 삭감으로 전력 저하가 현저했죠. 미 육군 총 병력은 2차 대전 참전 당시의 절반 수준이었고, 심각한 자금 부족으로 포병 부대는 탄약 부족으로 제대로 된 훈련조차 못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기지에서는 화장지도 1회 용변당 2장만 쓰라고 명령받을 정도였죠. 당시 미군은 2차세계대전 승리에 취해있었고, 미국 국내는 군비축소에 요구에 대응해야했고, 명성만큼 강한 상태가 아니었던 겁니다. 

 

그럼에도 맥아더 같은 군 수뇌부는 2차 대전 기억 때문에 미군을 과대평가하고 있었고, 미군이 개입하기만하면 북한군 침략을 쉽게 막을 수 있다고 '꿈꾸고' 있었습니다. 현실은 달랐죠.

 

3. 첫 지상군 투입과 처참한 결과

세계 최강이라 불리던 미군은 사실 어떤 상태였을까요? 첫 미국 지상군이 한국에 도착했을 때, 과연 승리했을까요? 상황이 심각해지자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의 선발대, **스미스 특수 임무 부대(스미스 지대)**가 급히 투입되었습니다. 이 부대는 7월 1일에 부산에 도착했고 다음 날 대전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7월 5일 오전 8시 16분, 스미스 부대 포병이 한국 전쟁에서 미군이 발사한 첫 탄을 쐈습니다. 북한군의 T-34 전차를 향한 것이었죠. 하지만 스미스 지대의 60mm 바주카로는 소용이 없었습니다. 결과는 스미스 지대의 괴멸이었습니다. 그들은 탄약은 소총 1개당 120발, 식량은 2일분만 가지고 있었다고하죠. 그야말로 준비 안 된 상태에서 급하게 투입되어 처참한 패배를 맛본 겁니다.

 

4. 유엔 참전과 절박했던 낙동강 방어선

미국의 이런 초기 패배의 충격으로 국제사회도 움직였습니다. 7월 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한국 방어를 위한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84호를 통과시켰습니다. 이것이 유엔군 파병의 근거가 되었죠. 맥아더를 사령관으로 하는 미군 중심의 유엔군이 결성되었고, 영국, 호주, 뉴질랜드 등 여러 나라가 합류했습니다. 하지만 초기 유엔군은 준비 부족과 장비 열세로 각지에서 패배를 거듭했습니다. 미군 제24사단 본대도 도착했지만 북한군 전차 부대에 밀려 심지어 사단장이 포로가 되기까지 했습니다.

 

 

 

병력이 부족했던 미군은 병사 확보를 위해 강압적인 수단까지 썼습니다. 일본에서 범죄를 저지른 미군 병사들에게 '조선에서 싸우면 범죄 기록을 탕감해 주겠다'는 선택지를 주거나, 이미 제대하고 정상 생활로 돌아갔던 해병대원을 기간을 강제 연장하고 훈련도 일주일정도로 급하게 전선으로 보내기도 했습니다. 얼마나 병력이 절박했는지 알 수 있는 장면입니다. 이 절박한 상황에서 미군은 부산을 중심으로 한반도 동남단에 반원형 방어 진지, 즉 낙동강 방어선(부산교두보)을 구축했습니다. 워커 장군은 '이 선을 사수한다. 우리는 승리한다'는 'Stand or Die'(진지 고수인가 죽음인가)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시기 한국군과 조선인민공화국군 양측에서 민간인 학살 등 끔찍한 사건들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유엔군은 이 철수로 방어선이 축소되어 통신, 보급선이 안정되고 병력 집중이 가능해졌습니다. 미국 본토에서 정예 부대가 증원되었고, 미군 전력은 나날이 증강된 반면, 조선인민공화국군은 큰 손해를 입어 전력차가 비등해졌고, 특히 조선인민공화국군은 미군의 압도적인 공군력과 포격에 대책이 형편없어 도로 이동 중 공습에 큰 피해를 입기시작했습니다.

 

5. 인천상륙작전과 전세 역전

전선이 낙동강으로 밀려 있던 7월 10일, 맥아더는 한반도 지도에서 인천을 지팡이로 두드리며 상륙 지점으로 낙점했습니다. 하지만 미 합동참모본부는 인천이 서울과 가깝고 북한군 대병력이 있을 우려, 그리고 무엇보다 조수 간만 차가 심하고 물살이 빨라 상륙 작전에 매우 부적합하다는 점을 우려하며 반대하며 대신 군산을 제안하기도 했죠. 군산상륙작전이 될 뻔했죠. 실제로 위장 작전으로 군산 역을 B-26으로 폭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맥아더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7개국 261척의 대함대와 주일미군 대부분을 이끌고 인천으로 출항했습니다. 미국 제7함대는 항공모함 4척 (트릴리프, 필리핀·씨, 발리·포지, 복서), 호위 항공모함 2척(바도엔·스트레이트, 시실리)을 보유했고, 프랑스,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네덜란드 등의 함정이 참전했고, 한국도 초계정 4척, 소해정 7척이 출항해서, 부산, 요코하마, 고베, 사세보에서 출발해 함대는 태풍을 만나기도 했지만 결국 무사히 도착했고, 선박들의 함포 사격과 항공모함 함재기의 공습 속에 상륙이 시작되었습니다.

 

놀랍게도 김일성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소련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인천 주변에 경비대 수준의 소병력만 배치했습니다. 월미도에도 350명의 수비대만 있었죠. 인천항은 간만차가 최대 10미터나 되고, 간조시에는 주변이 갯벌로 변해버리고 서울까지는 한강을 이용해야하는데 기뢰로 봉쇄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죠. 한마디로 방심한거죠. 그 결과, 인천상륙작전은 대성공으로 끝났습니다. 슬레지해머 작전으로 불린 이 대규모 반격이 시작되자 전세는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조선인민공화국군의 T-34 탱크는 2차 대전에서 활약했던 M4A3E8 셔먼이나 M26 퍼싱 같은 미국의 강력한 신형 전차 앞에서 일방적으로 격파되며 괴멸했습니다. 당시 조선인민공화국이 보유했던 T-34 전차는 소련의 지원으로 242대가 있었고 남침시 150대 가량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보급 부대가 빈약했던 조선인민공화국군은 300km 이상 패주했고, 9월 28일 유엔군이 서울을 탈환했으며, 9월 29일에는 대한민국 수뇌부가 서울로 귀환했습니다.

 

6. 38선 돌파와 전쟁의 재시작

서울을 수복하며 전쟁이 조기에 마무리되는 분위기였습니다. 하지만 개전 이전부터 '북진 통일'을 내세웠던 한국군은 '조국 통일의 좋은 기회'로 여겼고 트루먼 대통령 조차 맥아더에게 38선을 돌파하는 것을 승인했습니다. 문제는 이는 유엔군의 본래 목적을 넘어선 것이고 북진시 조건이 있었습니다. **'소련이나 중국의 대규모 부대가 북한에 들어와 있지 않은 경우', '소련과 중국이 참전할 의도를 발표하지 않은 경우', '우리의 작전이 반격될 우려가 없는 경우'**에 한한다는 조건이었습니다.

 

논의 끝에 10월 7일, 미군 제1기병사단이 맥아더의 명령에 따라 38선을 넘어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이 날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1주년이기도 했는데,  중화인민공화국 총리인 주은래는 '중국 인민은 외국의 침략을 용인할 생각은 없고, 제국주의자들이 인접한 영토에 침입할 경우 이를 방치할 생각은 없다'는 명백한 경고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워싱턴은 이 성명을 단순한 위협으로 무시했습니다. 마오쩌둥은 결국  중화인민공화국의 전쟁 개입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예상대로, 한국전쟁은 북쪽에서 다시 시작되며, 중화인민공화국은 전쟁에 참가하기로 결정합니다.

 

자, 오늘 우리는 한국전쟁에 미국이 왜 한국을 도왔는지, 그 과정이 어떠했는지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처음에 미국은 한국을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고, 한국군 역시 전쟁 준비가 안 되어 있었습니다. 전쟁이 터졌을 때 미군조차 준비 부족과 과대평가 속에서 초기 패배를 겪었습니다. 하지만 북한의 침공이라는 사건 자체가 유엔의 참전 결의를 이끌어냈고, 절박한 방어전과 정예 부대 증원을 통해 전력을 증강했습니다. 그리고 위험을 무릅쓴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세를 뒤집었습니다. 그러나 '방어'라는 유엔의 원래 목적을 넘어, 한국군의 북진 의지와 미국의 판단에 따라 38선을 돌파하면서, 중화인민공화국의 명백한 경고를 무시한 결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참전으로 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됩니다. 이는 다음편에서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결국 미국이 한국을 도운 이유는 단순한 '정의'나 '계획된 전략'만이 아니라, 전쟁 발발이라는 사건에 대한 '반응'과 유엔 결의, 그리고 절박했던 방어전을 거치며 점차 군사적 목표와 개입 수준이 확대된 복합적인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초기 미국의 한국에 대한 전략적 인식과는 다른, 전쟁이 만들어낸 새로운 현실 속에서 미국의 역할이 결정되고 한미동뱅이 혈맹으로 변화해 나갔음을 알 수 있죠. 우리가 몰랐던 혼돈과 진실들은 미국의 한국전쟁 개입 이유를 더욱 복잡하고 흥미롭게 만들고 있네요. 오늘 이야기가 여러분께 한국전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