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부도

해상 제국의 몰락: 스페인은 왜 영국에게 밀렸을까? 제국의 잘못된 선택과 결과

다시읽는사회과부도 2025. 7. 4. 19:17

여러분,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16세기에서 17세기 초, 지구상에서 가장 광대한 영토를 자랑했던 스페인 제국을 지칭하는 말이었습니다. 유럽 최고의 위치에 있었던 이 나라가 도대체 왜 멈춰 섰을까요? 그리고 우리에게 어떤 점을 시사할까요? 오늘 이 미스터리를 함께 풀어보겠습니다.

 

https://youtu.be/BP8o1-xK8dI

 

 

유럽 최고의 제국, 스페인의 황금기

 

스페인이 가장 넓은 영토를 가졌던 시기는 16세기에서 17세기 초에 이르는 스페인 제국 시기입니다. 특히 펠리페 2세 시대에 그 절정에 달했습니다. 그 영토는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 이베리아 반도: 현재의 스페인 본토는 물론, 1580년부터 1640년까지는 포르투갈까지 포함한 이베리아 연합으로 스페인 왕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 아메리카 대륙: 북아메리카의 넓은 지역(현재 미국 남서부, 멕시코), 중앙아메리카, 남아메리카의 대부분(브라질 제외)을 아울렀습니다. 특히 멕시코, 페루, 콜롬비아, 아르헨티나 등이 주요 식민지였죠.
  • 아시아: 필리핀 제도, 괌, 마리아나 제도까지 스페인의 깃발 아래 있었습니다.
  • 유럽: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이탈리아 남부(나폴리, 시칠리아, 사르데냐)는 물론, 신성 로마 제국의 합스부르크 가문 영토 상당 부분도 스페인 왕가와 혈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 아프리카: 카나리아 제도와 북아프리카의 일부 해안 도시들도 스페인의 영향권에 있었습니다.

정확한 면적을 하나의 숫자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1780년 어림 면적 기준으로 약 13,700,000 km²에 달했다고 합니다. 현재 미국이나 캐나다, 중국보다 넓고, 러시아의 80%에 해당하는 영토를 지배하던 나라였습니다. 상상해보십시오!

이때의 경쟁 상대를 보면 스페인의 위용이 더욱 두드러집니다. 1920년경 영국 제국의 최대 영토인 약 35,500,000 km²에 비하면 40% 정도였지만, 스페인의 전성기인 16-17세기 초에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 술레이만 대제가 지배하는 오스만 제국이 약 5,200,000 km².
  • 청나라나 명나라가 약 6,500,000 km².
  • 러시아 제국도 약 5,400,000 km²에 불과했습니다.
  • 당시 영국은 숨죽이고 있었고, 프랑스는 아직 떠오르기 전이었으며, 신성 로마 제국은 약한 연합체 수준이었습니다.
  •  

스페인 제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릴 만큼 광대한 영토를 소유하며 16세기와 17세기 유럽 및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 중 하나였습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가장 큰 이유는 유럽에서 가장 바다와 가까웠던 나라이기 때문이며, 스페인은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죠.

 

 

몰락의 시작: 수도 이전의 그림자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스페인은 더 이상 성장을 멈추고 그 유리한 지정학적 입지를 버리고 해양 국가에서 내륙 국가가 되어버립니다. 도대체 스페인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펠리페 2세는 스페인 왕위를 계승한 후, 수도를 마드리드로 정하고 그곳에 엘 에스코리알 궁전을 건설하며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했습니다. 마드리드는 당시 비교적 작은 도시였고, 강력한 기득권 세력이 없어 왕실이 통치 체제를 확립하기에 용이했습니다. 사실상 수도 이전을 한 것이죠.

 

 

그러나 이 결정은 스페인 제국 운명의 큰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마드리드는 만사나레스강이라는 작은 강에 접해 있습니다. 이 강은 수심이 얕고 규모가 작아서 대형 선박은 물론이고 중소형 선박의 통행도 거의 불가능합니다. 즉, 마드리드는 런던처럼 강을 통해 바다로 직접 연결되는 항만 도시 기능을 할 수 없는 완벽한 내륙 도시입니다.

 

 

런던의 템스강은 너비가 넓고 수심이 깊어 과거부터 대형 선박이 런던 시내까지 직접 접근할 수 있는 중요한 수로 역할을 했습니다. 런던은 항만 시설이 잘 발달되어 있었고, 템스강을 통해 북해와 대서양으로 쉽게 연결되었습니다. 이것이 런던이 내륙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상 무역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던 핵심 이유입니다.

 

 

스페인 지도부가 마드리드를 수도로 정함으로써 '지리적 중심성'과 '왕권 강화'라는 이점을 얻었지만, 이는 동시에 주요 항구 도시들과의 물리적 거리를 의미했습니다. 이로 인해 왕실이 해양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관심과 즉각적인 대응력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았을 수 있습니다. 스페인 제국의 쇠퇴에는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지만, 수도의 내륙 위치가 해상 무역 및 해군력 발전의 '심리적/행정적 거리'를 만들고, 해양 문제에 대한 우선순위를 낮추는 데 일조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습니다.

 

마드리드는 대형 선박이 접근할 수 있는 강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물류는 주로 육상 운송에 의존했습니다. 스페인의 험준한 지형을 고려할 때, 노새가 당시 가장 중요한 운송 동물이었고, 수많은 노새 몰이꾼들이 네트워크를 이루어 전국 각지에서 물품을 마드리드로 운반했습니다. 무거운 짐은 소가, 빠른 운송은 말이 사용되었죠. 하지만 도로 상태가 전반적으로 열악하여 운송 효율이 매우 낮았습니다. 18세기에는 강을 운하로 만들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마드리드는 내륙 운송 시스템의 허브였고, 해상 무역과는 간접적으로 연결되는 구조였습니다. 이는 광대한 식민지와의 교류에도 큰 제약을 가져왔습니다. 펠리페 2세 이후의 국왕들은 중앙집권화와 관료제를 강화했지만, 이것이 오히려 관료주의와 부패로 이어지며 비효율을 낳았습니다.

 

추락하는 제국: 끊이지 않는 위기들

 

수도 이전 이후, 스페인 제국은 쇠퇴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합니다. 17세기는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라는 명성이 흔들리기 시작한 시기였습니다.

  • 모리스코 추방 (1609-1614년): 펠리페 3세 시대에 과거 이슬람교에서 강제로 가톨릭으로 개종한 '모리스코' 약 30만 명이 스페인에서 추방당했습니다. 이는 종교적 순수성을 강화하려는 시도였으나, 농업, 특히 발렌시아 지역의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 30년 전쟁 참전 및 로크루아 전투 패배 (1618-1648년): 스페인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일원으로서 신성 로마 제국을 지원하며 30년 전쟁에 깊이 개입했습니다. 그러나 1643년 로크루아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스페인 주력군이 대패하면서, '무적'으로 불리던 스페인 보병의 명성이 크게 실추되었습니다. 이는 스페인 군사력 약화의 상징적인 사건이었으며,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네덜란드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 카탈루냐 반란 (1640-1652년): 펠리페 4세 시대, 중앙집권화 정책과 전쟁 비용 부담 요구에 반발하여 카탈루냐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이 반란은 스페인 중앙 정부에 큰 부담을 주었습니다.
  • 포르투갈 독립 (1640년): 스페인의 통치에 대한 불만과 포르투갈 민족주의의 고조로 인해 1640년 포르투갈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주앙 4세를 국왕으로 추대하며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이어진 전쟁 끝에 스페인은 1668년 리스본 조약으로 포르투갈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스페인 제국의 영토 축소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내륙과 해양 모두에서 영향력을 잃게 됩니다.
  • 피레네 조약 (1659년): 프랑스와의 전쟁이 이어지다가, 1659년 피레네 조약이 체결되면서 스페인은 프랑스에 루시옹 등의 영토를 할양했습니다. 이는 프랑스가 유럽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고 스페인의 영향력이 쇠퇴함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 경제적 쇠퇴와 재정 위기: 16세기 말부터 시작된 인플레이션,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은 유입 감소, 잦은 전쟁 비용, 그리고 모리스코 추방으로 인한 노동력 감소 등으로 스페인 경제는 지속적인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왕실은 만성적인 재정 적자에 시달렸고, 여러 차례 국가 부도(파산)를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 카를로스 2세의 통치와 왕위 계승 문제 (1665-1700년): 17세기 후반 병약하고 후사를 남기지 못한 카를로스 2세의 재위 기간 동안 스페인의 쇠퇴는 더욱 가속화되었고, 주변 강대국들의 스페인 왕위 계승에 대한 야심이 커졌습니다. 결국 그의 죽음은 18세기 초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1701-1714)으로 이어지며,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의 종말을 고하고 프랑스 루이 14세의 손자인 필리프가 스페인의 펠리페 5세로 즉위하며 부르봉 왕조의 시작을 알립니다. 이 전쟁의 결과 스페인은 유럽 내의 많은 영토(스페인령 네덜란드, 밀라노 공국, 나폴리 왕국 등)를 오스트리아에 넘겨주고, 시칠리아는 사보이아에, 지브롤터와 메노르카섬은 영국에 할양하게 됩니다.

 

19세기 들어서는 스페인에게 **'재앙의 세기'**라고 불릴 만큼 국력이 급격히 쇠퇴하고 혼란스러웠던 시기입니다. 이제 해외 식민지들이 하나씩 털리기 시작하죠.

  • 라틴 아메리카의 스페인 식민지 독립: 식민지에서 태어난 스페인 혈통인 크리오요 엘리트들은 스페인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계몽주의 사상과 미국 및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아 독립 움직임을 본격화했습니다. 1811년 파라과이의 독립을 시작으로, 멕시코(1821), 콜롬비아(1819), 페루(1821), 아르헨티나(1816) 등이 대표적입니다.
  • 미국과의 전쟁 패배: 결국 1898년 미국에게 패배하여 쿠바, 푸에르토리코, 괌, 필리핀 등 모든 식민지를 잃으면서 스페인 제국은 사실상 사라지게 됩니다.

 

이렇듯 스페인은 중앙집권화를 위한 수도 이전이라는 '선택' 이후, 군사적 패배, 경제적 위기, 그리고 광대한 식민지의 상실이라는 연쇄적인 재앙을 겪으며 몰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해양의 중요성: 스페인과 한국의 수도 비교

 

우리는 스페인의 사례를 통해 국가의 수도 이전이 얼마나 다양한 의미와 결과를 내포하는지 보았습니다. 스페인은 가장 넓은 영토를 가졌고 유럽에서 바다와 가장 가까웠던 나라였지만, 내륙 중심에 수도를 정하고 왕권 강화를 하면서 고립되었고, 결국 내부 갈등 속에 패권을 영국, 프랑스 등에 빼앗기며 상대적으로 2등 국가로 전락하고 말았죠.

 

그렇다면 우리의 수도 서울은 어떨까요? 서울은 내륙 도시였을까요? 그것은 현재의 고정관념일 수 있습니다. 한강은 폭이 2킬로미터나 되는 거대한 강이며 내륙 수송의 핵심이었습니다. 마포, 영등포, 군포, 김포, 제물포 등 수많은 포구가 있었고, 용산나루, 서강나루 등 수많은 나루터를 통해 물류가 모두 한강을 통해 왔습니다. 인천 제물포는 거대한 항구 도시였죠. 서울은 바다와 직접 연결되는 한강이라는 수로를 통해 물류의 중심지이자 해양으로 뻗어 나갈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도시였습니다.

 

전 세계의 많은 수도와 거대 도시들을 보십시오. 뉴욕, 런던, 시드니, 도쿄, 싱가포르, 홍콩, 로테르담, 함부르크, 오슬로, 코펜하겐, 두바이, 부산 등 많은 수도는 거대한 항구나 강을 반드시 포함합니다. 왜 그럴까요? 해양과 강은 단순히 물류의 통로를 넘어, 경제, 문화, 군사력의 근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대양으로 뻗어나가지 못하면, 아무리 광대한 영토를 가졌더라도 세계의 패권을 잡기는 어렵다는 것을 스페인의 역사가 웅변하고 있습니다.

 

 

결론 및 시사점

 

스페인은 여전히 전 세계에 그들의 문화가 깊숙이 녹아 있으며, 5억 7천만 명 이상의 스페인어 사용 인구가 세계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언어 중 하나를 구사합니다. 그러나 한때 유럽의 패권국이었던 스페인은 영국, 독일, 일본, 미국, 그리고 중국에까지 패권을 가진 국가들에 밀려나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지중해에 갇힌 이탈리아처럼, 대서양이라는 거대한 기회를 가졌음에도 스스로를 내륙에 가두었던 스페인의 모습은 아니었을까요?

한 국가가 내리는 중요한 결정, 특히 수도 이전과 같은 중대한 선택은 그 나라의 운명을 결정짓는 나비효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스페인은 거대한 제국에서 왜 관광 국가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 그들의 역사는 우리에게 국가가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얼마나 신중하고 미래를 내다봐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