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여러분과 함께 좀 깊이 파고들 주제는요. 바로 일본 역사의 큰 전환점이죠. 에도 막부의 탄생 그리고 그 초기 모습입니다.
일본 역사에서 가장 강력했던 두 이름, 도요토미와 도쿠가와. 일본 최고의 명문가였던 도요토미 가문이 저물고, 그 뒤를 이은 도쿠가와 가문이 무려 260년 남짓의 기간 동안 일본을 실질적으로 지배한 에도 시대의 드라마틱한 시작을, 쇼군과 다이묘의 관계, 그리고 역사적인 장소들을 중심으로 따라가 보겠습니다! 뭐랄까 우리에겐 조선시대였던 에도시대의 낯설고 복잡한 역사가 좀 선명해지실 거예요.
특히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후에 혼란상황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어떻게 판을 짜고 기반을 만들었는지, 그리고 아들 히데타다가 그 위에서 막부 체제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는지 그 과정이 중요합니다. 때는 바야흐로 16세기 말, 전란의 시대는 저물고 새로운 통일의 기운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미래의 패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 시기부터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덴쇼 13년(1585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슨푸성(駿府城)**이 근세 성곽으로 다시 축성되었습니다. 이때 처음으로 천수가 축조되었다고 합니다. 이듬해인 덴쇼 14년(1586년)에 이에야스는 17년간 살았던 하마마츠성에서 슨푸성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일본 최고의 명문가를 만들고 싶어 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런데 1598년 게이초 3년이죠. 이때 사망하면서 권력의 큰 구멍이 뻥 뚫린 겁니다. 바로 그때 등장하는 인물 도쿠가와 이에야스.
근데 히데요시 성 씨 얘기도 좀 재미있어요. 원래는 그냥 키노시타 가문이었거든요. 그때 명문가인 고노의 가문 양자로 들어가서 후지와라 씨가 돼요. 그리고 바로 그해 천왕한테서 도요토미라는 새로운 씨 성씨를 받습니다. 이에야스도 아버지는 마쓰다이라 히로타다(松平広忠)이며
마쓰다이라 가문이었으나 1566년 23살때 칙허에 따라 성씨를 세이와 겐지 계통의 도쿠가와로 바꿉니다. 이게 그냥 이름이 아니라 뭐랄까 정치적인 도구였어요. 전국의 다이묘들을 자기 밑으로 묶어두는 그런 상징. 성 자체가 권력의 상징이었죠.
게이초 5년(1600년), 천하의 명운을 가를 세키가하라 전투가 발발합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지휘를 맡은 동군은 시모노국 고야마(小山)에서 서군의 거병 소식을 듣고 서쪽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이에야스의 셋째 아들이자 미래의 쇼군이 될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지휘하는 3만 8천의 별동대는 우에스기에 대비한 후, 시나노국 평정을 위해 나카야마도를 지나 **우에다성(上田城)**으로 향하게 됩니다.
우에다성 공격 중 9월 8일에 이에야스로부터 즉시 상경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결국 히데타다의 군대는 9월 15일의 세키가하라 전투에는 결정적으로 늦고 맙니다.
세키가하라 전투 후, 이에야스는 가신들에게 후계자에 대해 물었습니다. 가신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렸어요. 혼다 마사노부는 둘째 아들 유키 히데야스를 밀었고, 또 용장으로 유명한 이나오마사나 혼다 타다카치는 넷째 아들 마츠다이라 타다요시를 추천했죠. 반면 오쿠보 다다노부(大久保忠佐)는 이제 난세가 끝나가는데 겸허한 인품과 지용, 문덕을 겸비한 히데타다만를 추천했습니다. 이게 단순히 핏줄만 본 게 아니라 무력 중심에서 안정적인 통치 중심으로 시대가 바뀌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니조성의 쇼군과 천황의 묘한 관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의 승리로 천하의 패권을 거머쥔 이에야스. 그는 수도 교토에 니조성(二条城)을 조영합니다. 니조성은 에도성의 분신으로서 도쿠가와 막부의 무위를 천하에 떨치고, 조정과 공가를 수호하며 쇼군이 상경했을 때 머무르는 거성 역할을 했습니다. 니조성은 위치 자체가 중요해요. 천왕이 있는 교토 고쇼 바로 옆에 떡하니 성을 지은 거거든요. 이건 막부가 천왕을 보호하는 동시에 감시도 하고 실질적인 권력은 우리한테 있다 이걸 보여주는거죠.
여기서 이에야스가 쇼군 취임 축하연도 열고 또 막부가 만든 법령 금중병공가제법도 같은 걸 발표하기도 했죠. 역사의 아이러니지만 막부 말기에는 마지막 쇼군이 여기서 대정봉환 그러니까 권력을 천왕한테 돌려준다고 선언한 곳이기도 해요.
마침내! 게이초 10년(1605년), 초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 막부를 개부하고, 곧바로 쇼군직을 아들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물려줍니다.
성은 그 시대 권력의 얼굴이었죠. 군사기지이면서 행정 중심지 역할도 했고요.
이에야스는 **대왕소(大御所)**가 되어 슨푸성에 은거성을 세우고, 은퇴 후에도 정치적 영향력을 계속 행사하는 **이원정치(二元政治)**의 기틀을 마련합니다. 이때 슨푸성은 대대적인 증축을 거쳐 3중 해자를 가진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완성됩니다. 이때 덴카 부신이라고 해서 전국의 다이묘들한테 공사비랑 인력을 다 분담시켜서 성을 더 크게 확장했어요. 이게 그냥 성만 짓는 게 아니라 다이묘들 돈 쓰게 만들고 막부 힘을 과시하는 수단이기도 했어요.
에도 시대 (약 260년간)
이렇게 도쿠가와 가문이 일본을 실질적으로 지배한 약 260년 남짓의 기간을 우리는 '에도 시대'라고 부릅니다. 이 시기, 쇼군으로 알려진 정이대장군은 사실상 도쿠가와 씨가 세습했습니다.
에도시대 지배 구조는 한마디로 막번 체제라고 할 수 있어요. 중앙정부인 막부 즉 쇼군의 정부랑 지방 영주인 다이묘들이 다스리는 번 이 두 개로 이루어진 구조죠. 도쿠가와 쇼군 가문은 260여 명의 무가 다이묘와 주종 관계를 맺고 그들을 통제하는 **막번 체제(幕藩体制)**에서 쇼군은 다이묘에게 **주인장(朱印状)**을 주어 그 영지(지행, 知行)를 보장했고, 다이묘는 해당 영지 내에서 어느 정도 독자적인 통치 권한을 가졌습니다. 이는 오늘날의 지방 자치제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이묘들은 도쿠가와 쇼군 가문과의 관계에 따라 일족의 가문 다이묘(친번, 親藩), 주로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에 도쿠가와 가문의 신하였던 후다이 다이묘(譜代), 세키가하라 전투 후부터 신하가 된 **외상 다이묘(外様)**로 분류되었습니다. 이들 간의 관계나 배치를 통해서 힘의 균형을 맞추고 혹시 모를 반란 같은 걸 막으려고 한 거죠.
초대 쇼군 이에야스는 자신의 아들들인 9남 요시나오를 오와리번(번청: 나고야성), 10남 요리노부를 기슈번(번청: 와카야마성), 11남 요리후사를 **미토번(번교: 고도칸)**에 봉하는 등, 이 셋을 특히 고산케라고 해서 중요하게 여겨 이 친번 다이묘를 배치하여 막부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2대 쇼군 히데타다의 형이자 이에야스의 둘째 아들인 유키 히데야스도 에치젠번에 봉해졌습니다. 봉건제이지만 친정부의 기반을 단단히 다졌죠. 대기업 재벌 그룹 계열사 같죠?
도쿠가와 막부는 오사카성을 1615년 오사카 전투로 도요토미 가문이 멸망한 뒤에 막부가 직접 관리하게 돼요. 오사카를 직할지로 삼고, 겐와 5년(1619년)부터 도도 다카토라 등당대 최고의 건축가들의 주도 하에 **오사카성을 막부의 새로운 거점으로 만들기 위한 대규모 재건(천하보청)**을 진행했습니다. 이 공사는 장기간에 걸쳐 간에이 5년(1628년)에 새로운 오사카성이 완성되었습니다.
또한, 이 시기 가토 기요마사에 의해 일본 3대 명성 중 하나로 꼽히는 **구마모토성(熊本城)**이 1607년에 완성되었고, 가가번주 마에다 씨의 거성인 **가나자와성(金沢城)**에서는 1602년에 낙뢰로 천수가 소실되기도 했습니다.
겐와 9년(1623년), 도쿠가와 히데타다도 아버지 이에야스를 본받아 쇼군직을 장남 이에미쓰에게 양보하고 대왕소로서 이원정치를 이어갑니다. 그는 오다와라성에서 정무를 볼 생각도 했었다고 전해집니다. 히데타다는 당연히 막부의 본거지인 에도성 그 중심인 혼마루에 살았죠.
그리고 성 서쪽 구역 니시노마루는 아버지 이에야스가 에도에 올 때 머무는 곳으로 썼고요. 히데타다 시절 주요 막부 신하로는 혼다 마사주미, 안도 나오스구 이노우에 마사나리 같은 인물들이 있었고요. 재밌는 게 외국인 고문인데 영국인 윌리엄 애덤스 일본 이름 미우라 안진, 그리고 네덜란드인 얀 요스텐 이 사람들이 활동했어요. 특히 얀 요스텐은 1600년에 표류해 온 네덜란드 배의 항해사였는데 이에야스랑 히데타다 신임을 얻어서 외교다리역 자문을 했죠. 지금 도쿄역 앞에 야에스라는 지역이 여기에서 왔다는 설도 있어요.
막부가 실질적인 권력을 쥐었지만 그래도 상징적인 권위는 천왕이랑 조정에 있었죠. 도쿠가와 가문은 히데타다의 딸 가즈코(和子)를 고미즈오 천황에게 시집보내 천황실의 외척이 되려 하는 공무합체 구상을 추진했지만, 황자 탄생 지연과 히데타다의 사망 등으로 계획대로 되지 않았고, 간에이 6년(1629년) 가즈코 사이에서 태어난 딸인 메이쇼 천황이 여성이었기 때문에 도쿠가와 가문의 외척 지위는 한 세대에서 끝나게 되죠.
에도 시대에는 대외적으로 쇄국 정책을 채택하여, 나가사키의 인공섬인 데지마(중국, 네덜란드)와 쓰시마번을 통한 조선과의 교류를 제외하고는 외국과의 교류를 금지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문을 닫는 분위기 속에서도 국내는 도시의 시대라고 할 만큼 도시가 엄청 발전했다는 게 참 아이러니해요. 계획적으로 대량 건설된 도시들이 사회 구조의 중심이 된 사례는 세계적으로 드물며, 18세기 초에는 교토와 오사카가 각각 약 40만 명, 에도는 100만 명에 달하는 인구를 자랑하며 일본 최대의 소비 도시일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에도와 오사카를 잇는 도카이도(東海道)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인파가 많은 길이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통제는 강했지만 그 안에서 상업과 문화가 꼽힐 기반이 마련된 거죠.
이처럼 도쿠가와 가문은 강력한 막번 체제를 통해 일본을 통치하며 약 260년간의 긴 에도 시대를 열었습니다. 쇼군을 중심으로 다이묘들을 통제하고, 주요 거점과 성들을 새롭게 정비하며 이룩한 이 시대는 오늘날 일본 사회와 문화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기고 현재의 오사카, 도쿄 2극체제를 구성하죠. 오늘은 이렇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전략과 아들 히데타다의 계승을 거쳐서 에도막부라는 큰 시스템이 어떻게만들어지고 자리를 잡아갔는지 주요 사건 인물 또 성이나 정책, 조정과의 관계까지 쭉 훑어봤습니다. 이게 앞으로 250년 넘게 이어질 에도 시대의 아주 중요한 시작점이었죠. 구독자들께서도 앞으로 일본 역사를 보실 때 편견없이 좀 더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이게 단순히 누가 이기고 졌냐의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시대 질서랑 문화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보여주는 생생한 현장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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